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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몽 크노의 <떡갈나무와 개>
    Book 2022. 3. 12.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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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는 한 편 한 편마다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 있다.

    레몽 크노

    오랜만에 시집을 집어 들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일상에서 시어 같은 유려한 텍스트가 딱히 필요 없었기 때문이지만 현실적인 면으로만 책을 고른 점에서 늘 마음 한구석은 무거웠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이다 못해 머리와 아이디어는 바짝 말라버렸고 무미건조한 삶은 퍼석퍼석함 그 자체가 되었다. 시집이 필요하다 싶었다.

     

     

    작가도 작가지만 제목이 흥미로웠다. 북 커버 디자인도 내가 좋아하는 컬러 조합이라 끌렸다. 민음사에서 발행한 세계시인선 리뉴얼판이라 시리즈 전반적으로 깔끔한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문체 연습>이라는 책으로 국내에 많이 알려진 레몽 크노는 소설가이면서 평생 천 편에 가까운 시를 쓴 시인이기도 하다. 20세기 프랑스 문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기도 한 레몽 크노는 초현실주의자로서 극단에 가까운 다양한 언어 실험을 시도했다.

    <떡갈나무와 개>는 어려운 시다. 분명 상당한 고통이 동반된 번역서를 나는 그저 편하게 읽는다지만 국문을 이해하기에도 나의 지경은 한참 부족하다 느낀다. 그럼에도 이 시집을 읽다 보면 그가 던져놓은 실험이라는 덫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툭툭 터져 나오는 유머러스함에 즐겁다.

     

    그렇게 나는 공부를 시작했고
    나는 하나 이상의 학위를 땄다.
    오호라! 훗날 내가 되게 될
    가엾은 젊은이가 여기 있네.

    P.73

     

    또 왜 이렇게 독하게 구는 것이냐고?
    내 고통을 내가 즐기면서
    무능함을 비웃었더니,
    커다란 자아가 내 자아를 삼켜 버렸다.
    P.83

     

     

    레몽 크노는 소설가, 시인 이외에도 수학자, 번역가, 시나리오 작가 등 다채로운 삶을 누렸던 동시에 언어 역시 시어와 구어의 경계를 없애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떡갈나무의 개> 역시 '운문소설'이라는 부제답게 운문으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낸 시도로 색다른 접근을 시도하였다.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더는 잠을 청하지 못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작은 목소리가 있다.
    꾸짖고 또 꾸짖고 또 꾸짖는 굵직한 목소리가 있어
    분노가 소란으로 변한 후 끝날 줄을 모른다.
    P.103

     

    떡갈나무는 고결하고 위대하다
    떡갈나무는 강하다 그리고 힘차다
    떡갈나무는 푸르른 생기로 넘쳐난다
    떡갈나무는 고결하고 당당하다.

    P.121

     

    이 책은 레몽 크노의 자전적 스토리를 담고 있는데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작가의 유년 시절에 대한 내용이다. 갖가지 과거에 대한 회상과 사건마다 느낀 깊은 감정들, 혼란들을 담고 있다. 2부는 정신 분석의 시기로,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에 받은 정신 분석 치료의 경험이 담겨 있다.

     

    그런 어느 날 돈을 내야 했다,
    그러자 일이 심각해졌다,
    이후 어느 날 치러야 하는
    진료비 같은 게 생겨났다.
    P.115

     

    한편 가까이에 들어 주는
    사람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당신의 불평을 존중해 주는
    섬세한 정신분석가 앞에서
    거의 매일 아침 자신의
    연기를 펼치는 게 사뭇 유쾌했다
    P.115

     

    또한, 작가의 꿈에 대해 고스란히 적혀 있다. 초현실주의 작가답게 꿈을 따르는 그의 고백이 돋보인다.

     

    꿈이 많아서 무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꿈은 몇 년씩 지속되었다,
    내 꿈은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과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말들로 점점 늘어났다.
    P.86

     

    3부 '마을의 축제'에서는 1, 2부와는 확연히 다른 화법과 문체를 사용하는데 좀 더 구어체를 활용하여 축제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의 분위기 역시 자전적이기 보다 관찰하는 자의 입장에서 표현하고 있어 독특하게 느껴진다.

     

    커다랬다 커다랬다 사람들 기쁨의 마음의 저 기쁨은
    산 너머로 태양을 춤추게 하고 수확물을 거둬들이는
    대지를
    요동치게 할 만큼
    P.131

     

    아 술병이여 아 술병이여 당신에게 감추면 안 된다
    우리는 술통이 익는 지하실로 내려간다
    봐라 저들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지 않는가
    P.135

     

     

    <가디언>에서는 레몽 크노를 '여러 문학 형식 및 실천 찾기 전용의 오픈 소스형 유파를 창시했다.'라고 평했다. 문맥만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전통과 현대의 언어 사이 그 어딘가에서 실험을 할 수 있는 언어의 플랫폼을 선사한 작가라는 평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사무엘 베케트가 무질서함과 혼란 속에서 인간의 실존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해 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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