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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났어>, 마음 치유 레시피
    Book 2022. 3. 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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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안 곳곳에 오래 묵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 짐이 되기 시작했다. 정리를 하자고 마음먹은 후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른다.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로 마음이 불편했고, 갑갑함에 영혼이 좀먹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새해 첫날부터 버리기 시작했다. 책장을 가득 채운 오랜 책들도 박스에 챙겨 팔아치우고, 일부는 버렸다. 지금도 청소는 열심히(?) 진행 중이다.

    그러다가 무려 20대의 내가 당시 미니홈피에 쓴 글을 프린트해서 묶어 놓은 작은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두려움을 느끼며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정말 내가 이 글을 쓴 건가 싶을 정도로 생각보다 꽤 괜찮은 글들이 많았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깊은 감성으로 깔끔하게 글을 썼다는 생각에 놀랐다.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났어>라는 책을 읽으며 청소하다가 오래된 나의 다이어리를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피식거리며 웃게 되는 문장들, 프리랜서로서 그리고 비거니즘으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두 저자의 고민이 오롯이 담긴 이 에세이는 거의 마음 치유 레시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 이것저것 거부하고 밀어내기 바쁘던 폐쇄적인 몸에 봄을 채워넣으니 몸안이 푸르러지는 듯하다. 나물이, 채소가 너무 좋다. 다 달라서 너무 좋다. 연신 그렇게 생각하며 봄 밥상을 먹는다.
    P.21

     

    비거니즘은 무언가를 포기하고 거부하고 지양하는 부정적 과정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하고 더 좋아하게 되고 마음이 열리는 긍정적인 과정이 되었다.
    P.40

     

    이 책의 저자 배우 손수현과 뮤지션 신승은은 다세대 주택 위아래 층에 모여 살며 자주 밥을 나누는 친구이다. 비슷한 나이, 프리랜서, 비건이라는 공통점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며 단계적 채식을 거쳐 비건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각 장은 저자들이 좋아하고 즐기며 때로는 나름 독특한 추억을 간직한 채소와 음식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차 좋아하게 된 두부며, 촬영 때마다 요리사인 친구가 스텝들을 위해 귀한 채소를 넣어 돌돌 말아준 김밥, 새롭게 친해지게 된 표고버섯과의 화해 에피소드들 모두 가벼운 듯 하나 묵직한 즐거움을 준다.

     

    나는 또 무엇을 새롭게 좋아하게 될까. 표고버섯과도 화해했다. 아니, 겨울 무가 이렇게 달았나? 익힌 배추가 이렇게 부드러운 맛이었어? 전에는 익숙한 것들만 찾았다면 이제는 호기심이 생긴다.
    P.44

     

    © arnaldoaldana, 출처 Unsplash

     

    두부는 콩이었고, 떡은 쌀이었고, 들깨는 깻잎과 한 몸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식자재는 아이같다. 뭐든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본연의 질감을 가득 지녔기에 가질 수 있는 순진무구함이 그러하다. 본질이 세상과 만나 멋지게 상호 작용을 할 때, 그 시너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P.50

     

    그야말로 마음 치유 레시피가 담긴 책이다. 두 저자는 본인들의 일상다반사를 다독이며 살고 있고, 그 이야기들로 읽는 이들을 살포시 안아주는 느낌이 든다.

    녹록지 않은 삶은 가까운 누군가가 내민 손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을, 혼자서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설거지를 하고 청소나 작은 요리를 하면서 충분히 괜찮을 수 있다는 비법을 알려준다.

     

    스트리밍 시스템은 마찬가지로 너무하다. 열심히 기타를 썰고, 가사를 볶고, 편곡을 데치고, 박자에 맞춰 무치고, 녹음실에서 펴고, 코러스 얹고, 믹싱 말고, 마스터링 썰어 만든 건데 진짜 조금 들어온다. 음원 사이트마다 다르긴 한데, 한 번당 1원이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P.59

     

    시스템이 바뀌어서 돈이 아티스트에게 더 많이 들어오면 좋겠지만, 그래서 내가 당근과 시금치, 우엉뿐만 아니라 두릅도 사서 넣어 보고, 더덕도 사서 넣어 보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지금대로 그냥 맹맹하게 말아 볼게.
    P.62

     

    © TeeFarm, 출처 Pixabay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저 버텨야 하는 날을 보내는 이들을 위한 마음 치유 레시피가 책 곳곳에 숨어 있어 더욱 매력적인 에세이다.

     

     

    밀가루빛 미래를 꿈꾸는 수제비라니 정말 탐나는 워딩이 아닐 수 없다. 요즘같이 서서히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며 한 번쯤 만들어 보고 싶은 레시피들이 잔뜩 수록되어 있다.

    감자볶음을 해 보자. 마음속으로 <해내자>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며 나를 일으켰다.
    P.76

     

    감자볶음을 먹고 나니 버티기 위해 억지로 참는 것은 그만해야겠다 싶었다. 그 과정이 나를 또 힘들게 할 테지만 그래도 이제 진짜 그만.
    P.77

     

    함께 모여 사는 친구들 이름으로 말장난하기, 아무 이유 없이 잡채를 만들다가 의미를 찾아가기,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부추전 만들기 등 조금은 사소해 보이고 별것 아닌 듯한 일상을 통해 저자는 비건을 지향하는 이로서의 고충과 만족 그리고 지속 가능성을 함께 고민한다.

     

    물론 비건을 지향하는 목적이 언제까지나 개인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속 가능성은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아무런 계기조차 생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P.205

     

    겉으로 드러난 주제는 비거니즘일지 몰라도 읽다 보면 나타나는 이 책의 깊은 줄기는 관계와 다양성이 아닐까. 고기를 먹지 않는 이들을 향해 왜 먹지 않냐는 질문이나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또 하나의 취향과 식문화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개념과 아량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라는 것.

    편리함으로 무장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살면서 가끔은 느릿느릿 게으른 하루를 보내며 내가 나에게 맛있는 요리 하나 해 줄 수 있어야 함을 알려주는 책이다.

    채소가 가진 본질이 나의 일상과 세상이 만날 때 일어날 수 있는 시너지를 일깨워주는 책이다.

    저자가 키우는 고양이의 표정이 그야말로 빠삭하다. 나도 이 책을 읽은 김에 냉장고에서 잠자고 있는 채소를 꺼내 요리를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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