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 술 마시며 읽기 좋은 책
    Book 2022. 3. 10. 20:50
    반응형

    하루키는 역시 하루키다. 오랜만에 집어 든 하루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참 달았다. 해가 쨍한 한낮에 읽는데도 그의 글은 위스키 한 잔을 떠오르게 한다.

    아쉽지만 오늘은 루이보스 티 한 잔과 함께 읽었다. 조용한 동네 카페에서 오롯이 혼자 앉아 책을 읽는 호사를 누렸다. 책마저 술술 읽히니 역시 술 마시며 읽기 좋은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언젠가 내 삶을 지나쳤을, 아니 분명히 내 곁을 지나간 사소한 것들과의 관계성을 담백하게 표현하기 때문이고, 기억 저편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내고야 마는 탁월한 필력 때문이기도 하다.

    <일인칭 단수> 역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맞아, 나에게도 이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흠칫하게 된다. 하루키가 쓴 매 에피소드들은 어찌 보면 단순한 상황에 대한 묘사 같으면서도, 메모를 꼭 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졌다. 책 곳곳에 숨겨진 그의 필살기를 발견하는 재미도 상당하다.

     

    그래도 만약 행운이 따라준다면 말이지만, 때로는 약간의 말語이 우리 곁에 남는다. 그것들은 밤이 이슥할 때 언덕 위로 올라가서, 몸에 꼭 들어맞게 판 작은 구덩이에 숨어들어, 기척을 죽이고, 세차게 휘몰아치는 시간의 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P.24

     

    "프랑스어로 '크렘 드 라 크렘'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나?"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프랑스어 같은 것은 전혀 모른다. "크림 중의 크림,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뜻이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그게 '크렘 드 라 크렘'이야, 알겠나? 나머지는 죄다 하찮고 시시할 뿐이지."
    P.45

     

     

    이 책에서는 제목 그대로 일인칭 시점의 '나'를 중심으로 나의 기억을 통해 사건과 관계를 되짚어 본다. 그로 인해 먼지처럼 사라지고 만 것들과 지금 나에게 보석처럼 남아있는 것들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지나간 것들로부터 아쉬워하는 독자들을 위로하면서.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P.49

     

    책 속에 등장하는 '나'는 읽는 이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기에 충분한 스타일로 등장한다. 시시하다 할 정도로 평범한 삶을 살며 겪었던 기억들과 만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찮고 시시했던 일들이 결국 '인생의 크림'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음을 깨달아간다.

    인생의 크림은 곧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시시콜콜하고 변변찮은 것들은 내가 성장하는 데에 자양분이 되었고, 무의미한 시간들은 결코 아니었다는 확신을 의미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영혼 깊숙한 곳의 핵심까지 가닿는 음악이었다는 것이다. 듣기 전과 들은 후에 몸의 구조가 조금은 달라진 듯 느껴지는 음악-그런 음악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P.67

     

    하루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재즈, 보사노바에 대한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그의 책은 역시 술 마시며 읽기 좋은 책이다. 루이보스 티 한 잔으로 깊은 아쉬움을 달래본다.

    몇 번이고 계속 되뇌며 읽게 되는 하루키 소설의 매력. 이 책에서도 수시로 반짝이는 문장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지." 버드가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완만한 것이기도 해. 자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프레이즈와 마찬가지야. 순식간에 지나가는 동시에, 한없이 잡아 늘일 수도 있지. 동쪽 해안에서 서쪽 해안만큼 길게-혹은 영원에 다다를 만큼 길게."
    P.68

     

     

    총 8가지의 소주제로 나뉜 이 소설은 '나'를 거쳐간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간다. '나를 바라보다' 이 한 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이다.

    내가 겪은 일들과,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풀어주어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그래, 나도 이만큼 성장해 왔어.'라는 심심한 위로를 얻게 해 준다.

    "기억이 날아간 사이에 누가 내 인격을 가로채거나 하는 건 아니래. 다중인격이라든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나는 언제나 나야. 기억이 사라진 사이에도 나는 나처럼, 그냥 평소처럼 행동한대."
    P.107

     

    어느 날 문득, '그러게, 나는 무얼 좋아할까?'라는 짠한 의문이 드는 날이라면, 누군가 '너는 무얼 좋아하니?'라고 물어봐 주기를 바라게 되는 날이 있다면,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를 읽어 보기를 바란다.

    나라는 존재가 서 있는 이곳이 생각보다 꽤 괜찮은 곳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생각보다 의미가 있기에 최대한 멋진 기억을 남겨 보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나는 야구장 좌석에 앉으면 제일 먼저 흑맥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P.147

     

    조금은 멋대가리 없게, 하루키의 책을 소개하기에 격이 떨어지는 표현이긴 하지만, 정말 술 마시며 읽기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마시지 못하더라도 이 책을 읽다 보면 위스키 한 잔을 꼭 곁들이고 싶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